|
||
제5장 노동의 영성
24. 교회의 특별한 임무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노동의 영성에 대하여 살펴봄으로써 이 회칙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노동이 언제나 인간의 행위인 이상 육체와 정신이 온전히 하나로 결합된 전인간이 노동을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구원의 복음 역시 육체만도
아니고 정신만도 아닌 전인간을 향해 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인도되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노동을 어떻게 보시며, 노동이 어떻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가 되는지를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깨닫고자
한다. 교회는 노동의 인간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노동에
관하여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사회를 복음화해야 하는 교회 사명에
분명히 속한다. 동시에 교회는 노동의 영성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며,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과 봉사직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깊게 할 수 있어야 한다. 25.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대로,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인간은 생활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그리고 이 믿는 이들에게는 이 노력이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땅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았으며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온 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 ([사목 헌장], 34항)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인간적인 역량의 한계 내에서, 창조주의 활동을 계속 발전시키고 창조된 가치와 자원을 발견하여 이를 더욱 진보시킴으로써 그 창조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성서에 드러나 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엿새 동안의 일과 일곱째 날의 휴식으로 이루어지는 창조활동이 하느님의
노동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본다. (창세 2,2 ; 출애 20,8.11 ; 신명 5,12-14
; 창세 2,3) 성서의 마지막 책인 묵시록에서도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나이다."하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적인 '노동'을 통해 이룩하시는 업적에 관하여 동일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묵시 15,3) 이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창세기는 첫번째 '노동의 복음'이다. 이는 노동의 존엄성을 일러주며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야 함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휴식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노동과 휴식으로써 당신의 창조 사업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요한 5,17) 하고 증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무(無)에서부터 창조하신 세상을 지탱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일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일치하여 '쉬도록' 운명 지워진(히브 4,1.9-10)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구원의 힘으로 일하신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느님이 뜻하신 대로 '일곱째 날'마다 쉬어야 하고 (신명 5,12-14;출애 20,8-12)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더욱 더 인간답게 되어 "주님이 당신의 종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마련한 휴식"(마태 25,21)을 준비해야 한다. 가장 일상적인 활동에까지 우리는 노동에 의해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함을 깨달아야 한다.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자신과 그 가족들을 위해 노동하면서 인간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창조주의 노동을 펼치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획을 역사 안에서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목 헌장], 34항) 이러한 노동에 관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특히 현대에서는 정신과 영혼이 긴장되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노동의 영성은 성숙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에 반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는 오히려 하느님의 좋으심을 드러내는 표징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건설에 주저하게 하지 않으며
동료에게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정의롭게 실천하도록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촉구한다.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가 노동하게 되는 가장 커다란 동기다. 공의회는 우리에게 우리가 창조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일상 생활에서 더욱 거룩하게 되도록 서로 서로 도와야
한다고 일깨운다. 이는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더욱 열심히 노동하여
인간 노동으로 창조된 재화가 창조주의 뜻대로 되어 가도록 노력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교회 헌장], 36항) 26. 노동하는 인간,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노동은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한낱 목수에게 주어진 지혜에 놀라 마지 않았다. (마르 6,2-3) 그 자신이 노동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행동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노동의 복음'을 실천하셨다. (마태 13,55)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활과 노동에 대하여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마태 6,25-34) 그분의 삶은 노동하는 세계에 속해 있으며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모습을 말할 때에 얼마나 노동을 사랑하는가를 보여 주신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구약성서에서도 인간의 노동과 직업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사, 약사, (집회 38,1-3.4-8) 목수 혹은 장인, (출애 31,1-5 ; 집회 38,27) 대장장이, 옹기장이, (이사 44,12 ; 집회(38,29-30) 농부, 학자, (창세 9,20 ; 전도 12,9-12) 선원, 건축가, (시 107,23-30 ; 창세 11,3) 음악가, 목자, (1사무 18,6-7 ; 창세 4,2) 그리고 어부(에제 47,10) 등이다.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찬사도 잘 알려져 있다. (잠언 31,15-27)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서 예수는 목자, (요한 10,1-6) 농부, 의사, (마르 12,1-12 ; 마태 4,23) 씨 뿌리는 사람, 관리인, (마르 4,1-9 ; 마태 13,52) 종, 청지기, (마태 24,45 ; 루가 12,42-48) 상인, 어부, (마태 13,45-50) 일꾼(마태 20,1-6) 등의 노동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의 여러 가지 노동에 대해서도 말한다. (마태 13,33) 또한 학자들의 노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마태 13,52) 또한 사도직 노동에 대해서도 추수하는 사람들이나, (마태 9,37 ; 요한 4,35-38) 어부들의 육체 노동에 비유한다. (마태 4,19) 그리스도의 노동에 대한 가르침은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에 잘 드러나 있다. (사도 18,3) 그는 자신이 천막 만드는 노동자였음을 자랑하며 사도로서도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노동해서 벌었음을 긍지로 삼았다. (사도 20,34-35)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권고하였다 :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2데살 3,12) 그리고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2데살 3,10)고도 말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격려했다 : "무슨 일에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골로 3,23-24) 이러한 가르침은 공의회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인간이 일을 할 때 사회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시켜
나간다. 인간 노동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되어야 하며 인류의 진정한
복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목 헌장] 35항) 이같은 노동의 영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천명한 올바른 의미의 진보와 발전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다. 마찬가지로 보다 나은 정의와 보다 넓은 형제애와 보다 인간다운 사회 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달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발전에 있어 물질적인 바탕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그 힘만으로는 인간의 발전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목 헌장] 35항) 현대의 사상을 지배하는 주제인 진보와 발전은 이와 같은 노동의 영성의 결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진보와 발전은 노동의 축복이다. 이것이 '노동의
복음'의 가르침이며 또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27.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노동에 대하여 말하는 것 인간의 노동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노동이 불가피하게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노동의 본질적인 차원으로서 복음에 잘 드러나 있다. 창세기에는 노동에 대한 축복이 죄악이 가져온 저주와 대조를 이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창세 3,17) 이 고통은 모든 사람의 삶을 죽음을 이끈다 :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창세 3,19) 나중에 쓰여진 전도서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리고 나서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 보니, 모든 일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 (전도 2,11) 어느 누구도 이 말과 무관한 사람은 없다. 노동의 '고통'에 관한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발견된다. 부활의 신비는, 사람들의 불순명과 대조를 이루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명을 포함한다. (로마 5,19) 또한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심도 드러낸다. 노동의 땀과 고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일에 사랑으로써 참여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의 일, 즉 구원 사업은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고통을
견디어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협력하는
것이다. 인간은 매일 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드러낸다. (루가 9,23)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깨
위에 세상이 지워주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또한 부활하신
주님으로서 그리스도는 당신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싸움을 격려하시고,
정화시키시며, 강화하신다. ([사목 헌장] §38) 그리스도인은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작은 부분을 발견하며,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선포를 듣는다.(2베드 3,13 ; 묵시 21,1) 노동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통이 없이는, 십자가가 노동의 영성에
꼭 필요한지를 절대로 확인할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십자가는
노동 자체로부터 솟아나오는 새로운 선(善)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이 십자가의 작은 일부라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공의회는 말한다 :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에 대한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예고해 주는 인간 공동체가 이 땅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현세적 진보를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구별해야겠지만,
이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보다 더 낫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사목 헌장],
§39)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진보에 있어서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있어서도 자기가 하는 노동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의 힘과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로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