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호 - 서울숭례문 (崇禮門)

고독을 못참아 갔단다

 

무자년

첫 초생달 따라

그 숭례문은 갔습니다

600년 역사를 견뎌 오며

온갓 시련에도 꾿꾿하게 지켜온 자존심도

순간의 화마에 영락없이 살아지고

국보 1호도 살아지고

졸지에 또 그 경제의 모서리에 사정없이 찢

문지킴이도 없는 고독한 세월을 보내다

이씨오백년 영고(榮苦)를 마지막으로 안고

그는 우리 모두 고요히 잠든 그 밤에

저 높은 하늘로 불꽃을 따라

훨훨훨 날아 올랐습니다

첫 초생달 따라

그 숭례문이 갔습니다

 

말동무도

지킴이도 없이

고독한 초생달 따라 

국보 1호는 조용히 갔습니다

지어준 그사람 이성계를 따라 갔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온 서울에 제일 먼저 반겨준 그대는 갔습니다

문화를 사랑하지만 망각증에 걸린 민족이여

이 기회에  저 땅 밑 깊은 곳에서 마음을 끌어 올려

민족의 정신을 아로새겨진 정신문화보물들을

그 보다 더 높은 곳에 소중히

그해 첫 초생달 따라

그 숭례문이 간일

기억합시다

 

 

누구는

아쉬워하고

누구는 짊어질 책임을

두려워 하고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겠으나

모두가 다 함께 책임저야할 공범이며 방관자입니다

서로가 책임을 떠다 밀고 있다는 것이 소가 웃고 개가 웃습니다.

지금도 옆에 남대문을 능가하는 국보가 있다한들 그 소중함을 

다시 이름만 복원한다고 한들 말로만 무엇을 못하리요

이미 숭례문의 혼이 떠난 마당에 모형만 다시 세운 들

그것으로 위로를 삼은 들

만족할 이가 그 몇이리요

그해 첫 초생달 따라

그 숭례문은 가고

없답니다  

2244  이 관희

 

 숭례문에 대한 개괄설명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며 원래의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다. 1394년(태조 4) 창건되었으나 지금의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  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 [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기해야 할 것은 이 건물의 지붕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한말에 찍은 숭례문 전경

건축 경위와 내용

[하층 평면도]

 조선시대 서울을 한양으로 정하고 그 경계를 성으로 쌓고 성문을 내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대문(大門)을 내었고 그 사이에 소문(小門)을 내었다. 대문의 이름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라 지었다.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하고 북대문은 지(智)를 정(靖)으로 고쳐 숙정문 (肅靖門)이라 하였다. 남대문인 숭례문은 도성 8문 중 가장 중요한 도성의 정문일 뿐만 아니라 교통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숭례문은 태조 5년(1396)에 창건하였으나, 세종 30년(1448)에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91~1996년의 해체 수리조사에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성종 10년(1479)에도 비교적 큰 보수공사가 있었다. 서울 성곽은 1907년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비루한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의 좌우를 헐고 지나간 이후 급속도로 허물어져 나갔다. 따라서 동대문과 더불어 남대문도 좌우의 성벽이 모두 헐려져 나갔다. 그 후 서울의 발달과 함께 도로가 넓혀지면서 몸채만 길 한가운데 남아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은 옆으로 긴 2층 누각의 외관과 견고한 성문, 그리고 직선적인 처마선 등이 조선 초기 건축의 건실함을 나타내고, 새 왕조 신수도의 대문으로서 여전히 당당한 위엄을 지니고 있다. 또한, 후기에 세워진 동대문과는 달리 옹성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방어의 목적보다는 도성의 주입구로서 상징성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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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맏형 양녕대군 친필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 후 32년이 지난 성종10년(1479)에 이르러 숭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대들보에 의하여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채수(蔡壽)와 좌승지 김승경(金升卿)등이 숭례문을 증수할 때 중국의 예에 의하여 문 밖에 옹성(甕城)도 쌓자고 하였으나, 성종이 "우리나라는 국력이 부족하여 일일이 중국을 본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숭례문까지 쳐들어온다면 그 때는 이미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니 옹성이 있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답하여 흥미롭다. 지금은 숭례문 중앙이 문이 아니라 양옆으로 난 도로가 지난날 성문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는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처마을 받치기 위해 기둥 윗 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굴곡이 심하지 않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석축(石築)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정면(正面) 5칸, 측면(側面) 2칸의 중층(重層)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지붕(屋蓋)은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으로 힘이 있고 간결한 살미첨차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수법(手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문은 외관(外觀)이 장중(莊重)하고 내부구조(內部構造)가 견실(堅實)하여 수도(首都)의 성문(城門)으로 당당한 면모(面貌)를 지닌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대표적(代表的) 건축(建築)이라 할 수 있다.

[종단면도]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의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을 뚫고 그 위에 2층의 목조 문루(門樓)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상층 외곽의 기둥들을 하층 외곽의 기둥열보다 안으로 들이밀어 세웠다. 내부 중앙에는 4개의 고주가 일렬로 세워져 위층 지붕틀까지 지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문루 내부의 공간이 앞뒤로 2분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매우 견고한 구조체계를 이루게 되어 내부의 실용성보다는 구조적 안정성을 더욱 우선했다고 볼 수 있다. 1448년에 다시 세울 때 성곽부분을 높이고 더 웅장하게 만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2층 지붕은 원래 팔작지붕이었던 것을 후대에 중수하면서 지금과 같은 우진각 지붕으로 개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둥 위에 많은 포작을 가진 다포계 구조를 채택했으며, 현존하는 다포계 건축 가운데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예다. 하층은 내외 모두 2출목이고, 상층은 외3출목, 내2출목의 포작 구성이다. 상하층 지붕 모두 양성을 했고,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장식하여 최고의 격식을 갖추었다.

 

 숭례문의 건축 양식은 정면(하층) 5칸(70척 5촌), 측면 2칸(25척 6촌 5분)의 중층(重層)우진각지붕의 다포집으로 건평 53.79평이다. 그리고 현존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건축 구조는 성벽보다 일단 높게 화강석으로 육교를 만들어 성로(城路)를 잇고 그 아래로 홍예를 틀어 대문을 내어 출입하게 하고 장방형(長方形) 육교 상면에 중층루(重層樓)를 세워 완성하였다. 중층 목조건물의 일종의 기단인 육교는 내외벽을 큼직한 선단석상(扇單石上)에 무사석을 쌓아 홍예 기석을 받고 홍예 기석상으로부터 홍예석을 쌓아 올린 홍예 좌우로 크고 작은 무사석을 층층히 쌓아 이룩하였다. 이 무사석의 뒷몸은 길고 짧아 적심과의 연계를 꾀하고 적심과 무사석은 칸칸이 서로 중첩하여 상호연계를 한층 더 견고히 하였다. 누는 이러한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상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평면의 구성은 하층이 평주14개와 고주4개로 되고 상층은 근정전(勤政殿)에서와 마찬가지로 하층 우주내곽에 따로 세운 우고주와 하층으로부터 올라오는 4개의 고주 그리고 병연주로 이루어졌다.

 

 

초석은 모두 융기부(隆起部)가 있는 원형이나 고주의 그것은 판석형(板石形)이고 우고주의 그것은 방주형의 것을 윗몸으로부터 말각(抹角)한 모양의 것이다. 아래층 축부(軸部)의 짜임은 기둥 아랫도리에 높직한 하방(下枋)이 있고 벽은 없이 기둥 윗몸에 창방과 평방을 놓고 주두를 놓아 내2출목, 외2출목의 공포를 조성하였다. 상층도 하층과 같으나 주간에 중방을 끼우고 조그만 판문을 연속하여 쭉 돌려 낸 것이 첨가되었다. 공포는 마찬가지의 내2출목, 외3출목, 공포의 세부 짜임은 두공위로 삼제공이 겹쳐 놓이고 주간에서는 그 위에 바깥쪽으로 삼분두된 살미첨차가 놓여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고, 기둥 위에서는 제공 위에 바로 대들보가 놓이게 되어 그것이 외목도리를 받게 되었다. 보머리도 역시 삼분두로 의장하였으며 이제공의 안쪽머리도 그렇게 하고 살미첨차의 뒷머리는 운각하여 변화를 주었다. 행공첨차는 두 끝으로 직절(直絶)하고 바닥을 둥글려 소위 고형 수법을 썼고 소로와 살미첨차 사이의 윗몸도 바닥에 따라 만곡부(彎曲部)를 넣어 당시 유행하던 수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형첨차는 여말 다포집의 유례 이래 각 건물에서 일반적인 통성(通性)으로 보이는 것인 바 이것 여하에 따라 시대의 설정을 추정하기도 하는 중요한 부재(部材)인 것이다.

 

 

 쇠서의 곡선은 비교적 강직한 편이나 개성 남대문의 그것보다는 훨씬 곡선미가 짙고 홍화문이나 돈화문보다는 한결 경직(頸直)한 편이다. 가구(架構)는 상하가 동일한 방법이나 하층의 그것은 마루를 깔기 위한 수단에서 그쳤고 상층은 지붕을 구성하기 위하여 대량(大樑) 위에 높직한 동자주를 세워 종량을 받고 종량에 중도리를 짜고 종량 위에 동자주형의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얹었다. 이러한 수법은 개성 남대문과 동일한 것이나 개성 남대문의 동자주는 위가 좁아져 간 것이고 대량아래에 따라 귀밀이한 방주(方柱)를 세워 보강을 한 것이 다르며 서울 남대문에서는 대량과 종량 사이에 각재형(角材形) 덧보를 이중으로 놓고 거기에 따로 뜬창방을 짜돌려 중도리를 보강한 것과 고주위로 동자주를 더 받쳐 종량을 보강하고 나아가 종대공을 힘있게 받도록 한 것이 그와 다르다. 양의 단면은 심원사(心源寺) 보광전이나 후기 홍화문 등에서 볼 수 있는 어깨는 그냥 두고 바닥만을 굴리는 수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같은 시대로 보여지는 봉정사(鳳停寺) 대웅전 · 환성사(環城寺) 대웅전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명정문(明政門)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귀천장이 없고 하층의 그것도 홍화문 등에서와 같은 우물천장이 없고 귀틀이 그냥 내보이도록 되어 있다. 2층의 마루는 장마루를 깔았다. 아래층은 모두 토간(土間)이나 중앙문 즉 홍예문의 천장 부분에만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겹처마, 각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이 놓이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가 있다. 그런데 1961년도 중수공사시 여러가지 명문이 발견되고 고단청(古丹靑) 문양 등이 검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숭례문은 당초 팔작지붕이었던 것이 후에 우진각지붕으로 고쳐졌음이 밝혀졌다.

 

 

건물 주위에는 여장이 쌓였고 그 좌우 측면의 한쪽으로는 각기 통용문이 개설되어 있으며 여장내로 떨어지는 물은 석루조(石漏槽)를 통하여 모두 배수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가치는 조선 초기의 성문 건축을 대표한다는 데 있다. 이 대표한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하나는 시대적인 가치이고 또 하나는 건축사상의 가치이다. 전자는 서울에만도 대소 성문이 있으나 그 초루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초기의 것은 이 건물이 유일한 것이어서 받는 각광이고, 후자의 경우에서는 개성 남대문을 본떠 지은 집이나 개성 남대문에서 이루지 못한 다포집 성문의 표본을 여기에서 비로소 개화하였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시 성내의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불과 몇 개의 건물이 잔존하게 된 것 가운데 이 건물이 비교적 상세히 여말 이래의 다포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일부자료 :naver.com 지식에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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